요크와 네빌 가문이 북쪽에서 군대를 모을 동안 왕과 서머싯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헨리 6세와 서머싯은 상의 끝에 5월 21일 레스터에서 잉글랜드의 모든 영주들이 참가하는 회의를 열기로 한다. 이 회의 소집장은 요크와 솔즈베리, 워릭을 포함한 잉글랜드의 모든 영주들에게 보내졌다.
만약 요크가 참석하면 생포해 죽이고, 참석하지 않으면 이것을 빌미로 요크를 공격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헨리6세는 성 폴 대성당에서 요크가 했던 ‘다시는 왕을 향해 무기를 들지 않겠다’ 는 맹세를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크에게 국왕의 속임수에 당해 어쩔 수 없이 한 맹세 따위를 지킬 마음은 없었다. 아니, 이미 국왕에게 공공연히 반기를 든 상황에선 지킬래야 지킬 수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무력 해제는 죽음이나, 잘해야 관직 박탈과 구금을 의미할 뿐이었다.
요크는 비현실적인 맹세를 지키는 대신, 무력에 의지하는, 좀 더 현실적인 방안을 선택했다. 요크군의 전력은 국왕군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국왕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대의는 국왕군쪽에 있었다. 정공법으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요크는 국왕의 계략을 역이용하기로 한다. 국왕이 회의를 이용해 요크를 사로잡으려 했다면, 요크는 그것을 역이용해 군대를 동원해 회의 장소인 레스터로 진군시키기로 한 것이다. 잘만 되면 귀족 전부와 국왕의 신변을 수중에 넣을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전력에서 열세인 적을 전쟁터로 끌어내는 효과를 거둘 수 있으니, 실패하더라도 밑질 건 없었다.
요크가 궁병, 파이크병 등으로 구성된 3천의 병력을 이끌고 그레이트 노스 로드(Great North Road)를 따라 런던으로 진군해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국왕은, 즉시 군대를 해산하지 않으면 반역자로 선포하겠다는 협박성 편지를 보내는 동시에, 5월 21일 2천이 안되는 군대를 이끌고 런던을 떠난다. 런던과 그 인근지역의 민심은 요크에게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런던 내에서 싸우길 꺼린 것이다.
런던을 떠나기 전에 귀족들에게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라는 지시를 내리긴 했지만, 적군 전력의 절반을 간신히 넘기는 병력으로 전투를 피하지 않은 것은 역시 요크가 과거에 했던 맹세를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세인트 올번 전투가 끝날 때까지 귀족들의 원병은 단 한명도 오지 않았다.
한편 런던으로 진군하는 도중 국왕이 보낸 협박성 편지를 받은 요크는, 국왕의 뒤를 쫒는 것으로 답장을 대신한다. 당장의 전력이 앞서 있고, 곧 적의 원군이 도착할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요크에게 급한 것은 국왕의 편지에 답장을 쓰는 것이 아닌, 적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국왕군을 따라잡아서 우세한 전력을 가지고 전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요크가 국왕의 편지에 답장을 한 것은 로이스턴에 도착한 후였다. 요크는 이 편지에서, 4월 21의 회의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것에 대해 항의하며, 서머싯을 제거하는 것을 군대 해산 조건으로 내세웠다.
물론, 이것은 왕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고, 요크 역시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요크는 천연덕스럽게도 다음날 똑같은 내용의 편지를 다시 보낸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오직 왕의 안녕뿐이라는 입바른 소리와 함께.
이 편지를 받은 헨리6세는 크게 놀라는데, 국왕을 놀라게 한 것은 편지의 내용이 아닌 요크군의 진군 속도였다. 요크의 편지는 요크군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고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헨리6세는 이때서야 요크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5월 22일 새벽, 요크군이 세인트 올번의 외곽 지역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헨리6세는 앞으로의 방침을 정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한다.
이쯤 되면 당연하겠지만, 군사령관이자 요크의 철천지 원수인 서머싯은 결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국왕군 내부에는 요크와의 협상을 주장하는 세력도 있었다. 협상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버킹엄 공작 서 험프리. 요크를 지지하진 않았지만 서머싯에 동조하지도 않았던 버킹엄 공작은 서머싯을 위해 싸우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국왕군은 전력에서 열세였고, 국왕군 내부에는 요크파의 거물 솔즈베리의 동생 월리엄 네빌과 요크파와 친분이 두터운 데본 백작 토머스도 있었기 때문에 명분도 충분했다.
열세인 상태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국왕은, 결국 버킹엄 공작의 말을 따라 요크와 협상을 시도하기로 하고, 원활한 협상을 위해 총사령관을 서머싯에서 버킹엄 공작으로 교체하는 강수를 둔다. 버킹엄 공작은 요크의 동서였기 때문에, 협상을 잘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요크군과 국왕군은 아침 9시 무렵에 거의 동시에 세인트 올번에 도착했다. 먼저 마을로 진입한 헨리6세는 마을광장에 본진을 설치하고, 마을로 통하는 두 길인 Sopwell Lane과 Shropshire Lane을 봉쇄했고, 요크군은 마을 동쪽에 있는 키 필드에 진영을 설치, 양군은 마을 동쪽에서 대치한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국왕군의 총사령관 버킹엄은 요크에게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하지만, 요크의 요구 조건은 오직 하나, 바로 서머싯의 몰락뿐이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지만, 이때까지도 국왕군은 평화적인 해결이 가능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같다. 총사령관이 주전파인 서머싯에서 화평파인 버킹엄으로 바뀐 것은 병사들의 임전태세에도 영향을 주었고, 언제부턴가 국왕군 내부는 평화적인 해결을 바라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국왕군의 대다수 장병들은, 비록 협상이 결렬되긴 했지만 이것이 곧 전투로 이어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이 때문에 오전 10시에 요크군이 감행한 정직한 공격은 국왕군에게는 예상치 못한 기습공격이 되고 말았다.
전투는 요크 공작과 네빌 부자가 Sopwell Lane과 Shropshire Lane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병력은 요크군이 많았지만, 전쟁터가 된 Sopwell Lane과 Shropshire Lane의 입구는 우세한 병력을 활용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었고, 전투는 혼전의 양상을 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병력을 전투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던 국왕군과는 달리, 병력에서 우세했던 요크군은 여유 병력을 후위대로 배치할 여유가 있었고, 이것이 승패를 가르는 열쇠가 된다.
이 후위대에 주목한 것은 바로 훗날 ‘킹 메이커’ 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는 워릭이었다. 전투 초반 워릭이 정확히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적군의 대부분이 Sopwell, Shropshire 두 Lane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왕이 있는 중앙의 방어가 상대적으로 허술하다는 것을 워릭이 간파했고, 키 필드에서 대기하고 있던 후위대를 모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두 Lane 사이의 정원으로 진격해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승부도 결정되었다.
예상치 않은 기습을 받은 국왕군의 중앙은 그대로 무너졌고, 가뜩이나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Sopwell Lane과 Shropshire Lane에 대부분의 전력을 투입했기 때문에 여유병력이 없었던 국왕군의 중앙은 속수무책으로 돌파당하고 말았다. 힘찬 트럼펫 소리에 맞춰 위풍당당하게 마을로 입성한 워릭의 후위대는 국왕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해 나갔고, 국왕이 머물고 있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Battlefield House까지 진군한다.
그리고 요크군이 마을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좌, 우익의 국왕군에게 전해진 바로 그때, Sopwell Lane과 Shropshire Lane의 치열한 전투의 승패도 결정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병사들은 배후에서 공격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방금 전까지 치열하게 요크군과 맞서던 군대는 오합지중이 되어 너도나도 중앙 정원을 향해 도망쳤다.
요크군에게 패주하는 국왕군은 더 이상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국왕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며 패주에 패주를 거듭했고, 워릭의 군사들이 쏴대는 악명높은 장궁-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에게 수많은 패배를 안겨 주었던-앞에서 국왕의 병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맹렬한 기세로 추격하는 요크군의 서슬파란 칼날 앞에선 국왕도, 총사령관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국왕의 편에 서서 참전했던 귀족 클리퍼드가 퇴로를 뚫다 전사했고, 네빌 가문의 원수이자 국왕파의 거물 노섬벌랜드 공작 역시 캐슬 인이라는 여관으로 피신하려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심지어 전직 총사령관이자 국왕파의 거두였던 서머싯마저 캐슬 인에서 요크군에 포위당해 적군 넷을 죽이고 장렬하게 전사한다.
그 밖에도 국왕인 헨리 6세가 목에, 총사령관 버킹엄이 얼굴에 부상을 입었고, 버킹엄을 비롯해 서머싯의 맏아들인 도싯과 데본, 펨브룩등 국왕파의 주요 귀족들이 포로로 잡히는 등, 국왕파는 그야말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훗날 ‘킹메이커’ 로 불리는 워릭의 중앙 공격이 이끌어낸 요크파의 대승이었다.









덧글
슈타인호프 2008/08/29 15:56 # 답글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장미전쟁 이야기를 뜻밖에 보게 되었네요.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Julianus 2008/08/29 19:10 #
덧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