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dors*1.장미전쟁-2)권력을 둘러싼 암투 *History

세인트 올번 전투의 원인이 클라렌스 공작과 요크 공작을 계승한 요크 공작 리차드와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6세와의 왕위 계승 다툼이었다면, 이 전투의 도화선이 된 것은 요크 공작과 서머싯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간의 불화였다.

요크 공작은 에드워드3세의 둘째 아들과 넷째 아들의 계승인으로써 그의 왕위 계승 순위는 왕인 헨리6세보다도 위였고, 만약 헨리6세가 후계자 없이 죽는다면 차기 왕위는 그의 차지가 될 터였다. 그리고 그는 그의 높은 지위와 그칠 줄 모르는 야망으로 인해,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국왕인 헨리6세가 신임하던 인물은 정작 다른 사람이었으니, 그가 바로 서머싯 공작이었다.

서머싯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는 곤트의 존의 서자로, 헨리6세의 작은할아버지뻘 되는 인물이었고, 또한 야심가이기도 해, 노르만 공 윌리엄1세가 그랬듯, 자신 또한 서자지만 다음번 왕위를 물러받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야심만큼 대단하지는 않았던 모양으로,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능이 야심을 따르지 못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서로 차기 왕위를 노리는 두 사람이라면, 둘의 사이가 좋을리 만무하다. 게다가 리처드는 서머싯 공작을 인정하지 않았고, 에드먼드 역시 리처드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어쩌면, 요크 공작은 자신이 그 재능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서머싯이 왕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요크 공작의 불만에 불을 지피는 일이 일어난다.

헨리6세는 서머싯 공작을 총애하기는 했지만, 자신보다 왕위 계승순위가 높은데다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요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1436년 왕은 요크를 프랑스의 총독으로 임명하게 된다. 그러나 지원을 충분히 해주지는 않았던 모양으로, 요크 공작은 자신의 개인돈 26000파운드를 전비로 쓸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악조건 하에서도 요크 공작은 정력적으로 일에 매달려, 상당한 전과를 거둔다.

그러나 라이벌인 서머싯도 요크 공작의 성공을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서머싯은 요크 공작을 모함했고, 요크 공작을 프랑스 총독으로 임명하기는 했지만 신뢰하지는 않았던 헨리6세는 총신 서머싯의 모함을 받아들여 1447년 요크를 아일랜드 총독에 임명하고, 서머싯을 요크의 후임 프랑스 총독으로 임명했다. 요크에게는 좌천이나 다름없는 모욕적인 인사였다.

거기에 더해 요크에게는 한푼도 지원해 주지 않았던 전비를 서머싯에게 2만 5천 파운드나 지원해주자, 요크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분노한 요크에겐 요크가 잉글랜드 곳곳에 영지를 가진 엄청난 부호였던 반면 서머싯은 경제적으론 그리 유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프랑스로 출발한 서머싯이었지만, 서머싯이 프랑스에서 수행한 전쟁은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를7세에게 패전을 거듭, 1450년 루앙과 노르망디를 프랑스에 넘겨준 채, 잉글랜드로 돌아오고 만다.

패전한 채 돌아온 서머싯이었지만 왕의 신뢰는 여전했고, 돌아올 때에도 왕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서머싯은 일반 민중에게는 전혀 사랑받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잭 케이드의 반란에서 서머싯은 타도의 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이렇게 런던의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요크 공작은 1450년 9월 영지 아일랜드롤 떠나 웨일즈에 상륙한 후, 런던으로의 진군을 감행한다.

요크 공작이 이런 반역이나 다름없는 행동을 감행한 데에는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요크가 사유 재산을 털어가며 프랑스와의 전쟁에 전념, 상당한 전과를 올렸을에도 좌천된 반면 서머싯은 왕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 패전을 거듭하며 잉글랜드로 도망치듯 돌아와 민심을 잃고 지탄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요크의 런던 진군에 당황한 헨리6세와 서미싯은 요크 공작을 체포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요크 공작은 민중과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왕 앞에 서게 되었다. 이에 놀란 왕은 한발 물러서고, 서머싯에게 기우는 듯이 보였던 세력의 균형은 다시 요크 공작에게로 기운다.

이걸로는 만족할 수 없었을까. 1451년 6월 보르도와 가스코뉴를 프랑스에게 내주는 등 백년전쟁의 형세가 영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요크는 프랑스에서 영국이 고전하는 것은 왕이 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기 때문이라며 왕의 최고고문관인 서머싯을 비난한 뒤, 국왕과 잉글랜드를 서머싯의 사악한 손아귀에서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2차 런던 진군을 감행한다.

또다시 런던 진군을 감행한 요크가 기대한 것은 민중과 귀족들의 지지. 그러나 1차 런던 진군때와는 달리, 요크에게 합류한 귀족은 소수였다. 그러나 요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진군을 계속, 1451년 3월 1일 런던 교외의 블랙히스에서 국왕군과 대치한다.

그러나 이어 열린 국왕군의 작전회의에서는 요크와 협상을 하자는 결론이 나왔다. 당시 국왕군에 종군하고 있던 요크의 처남 솔즈베리와 그의 아들 리처드 네빌 등의 화평파가 대세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곧 열린 회담에서 요크는 철군 조건으로 프랑스에서 실패를 거듭한 서머싯의 재판 회부. 이에 헨리6세는 여기에 동의하는 척했고, 이것을 믿고 군대를 해산하고 왕의 막사로 찾아간 요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체포영장이었다.

요크는 3달 후 다시는 왕을 향해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존 툴벗 백작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프랑스로부터 보르도를 탈환하므로써 서머싯이 있는 한 프랑스에서의 전세가 호전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요크 공작의 말이 근거없는 주장이 되어 버렸으며, 1453년 왕비 마거릿이 아들을 출산, 차기 왕위를 노리던 요크의 야망은 좌절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하늘이 요크를 도우셨을까. 재기를 위해 절치부심하던 요크에게 재기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1453년 8월. 톨벗 공작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카스티용 전투에서 대패하고 톨벗 공작은 전사해 버린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헨리6세는 실의에 빠진 나머지 병상에 눕게 된다. 국가 권력의 중심이 비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재능보다는 왕의 작은할아버지라는 지위와 왕의 총애에 의지해 국정을 주도해 나가던 서머싯에게는 엄청난 타격이었다. 귀족과 민중에게 인망이 있지도 않았고, 재능 역시 특출나지 않았던 서머싯이 권력을 유지하는 길은 단 한가지. 국왕이 국정을 집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니 섭정을 임명해야 했는데, 그 자신이 섭정이 되어 대리청정하는 길 뿐이었다.

섭정은 귀족들의 회의에서 선출된다. 그래서 섭정이 되려면 귀족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 요크는 여전히 귀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서머싯이 회의를 소집할 때, 그런 요크를 배제시킨 것은 서머싯에게는 당연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이제 서머싯에게 자신이 섭정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귀족들이 회의의 주재자인 자신을 놔두고 회의에 참석하지도 못한 요크를 섭정으로 뽑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회의에선 서머싯이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국왕군의 편에 서서 종군하기도 했지만, 요크 공작의 외가 식구이자 영향력이 큰 귀족이었던 솔즈베리와 워릭의 회의 참석을 허용한 것이 화근이었다. 어쩌면, 서머싯은 블랙히스의 대치에서 그들이 자신의 편에 서서 참전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솔즈베리와 워릭을 자신의 편으로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손자격인 요크 공작과 경쟁하는 그에겐 솔즈베리가 요크의 처남이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 다툼에서 혈연관계는 그렇게 중요한 관계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처남과 매형은 친척이긴 하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다. 솔즈베리-워릭 네빌 부자도 단순히 매형이라는 이유뿐이었다면 요크를 지지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네빌 부자는 요크 공작을 지지했을까? 1453년 6월 헨리6세가 원래 네빌가의 영지였던 글래모건을 서머싯에게 주었던 것이 문제였다. 자신의 영지를 빼앗긴 솔즈베리가 서머싯에게 반감을 가진 것도 당연했다.

여기에 왕이 쓰러진 직후 퍼시 가문의 노섬벌랜드 백작이 잃어버린 영지를 되찾기 위해 솔즈베리의 동생 토머스 네빌의 결혼 행렬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원래 네빌 가문과 퍼시 가문은 대대로 앙숙이었는데, 1403년 노섬벌랜드 백작의 아버지는 헨리 4세에 대항하는 반란군 편에 서 참전했다가 패배, 전사했으며 백작의 지위와 그 영지를 모두 몰수당하고 말았다. 그 후, 지금의 노섬벌랜드 백작은 왕을 충실히 섬겨 잃었던 영지 대부분을 되찾았으나 아직 되찾지 못한 영지도 몇 군데 남아 있었다. 그 중에는 요크셔의 레슬과 링컨셔의 버웰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모두 크롬웰 가문의 영지였다. 그리고, 네빌 가문의 토머스와 크롬웰 가문의 스탠호프의 혼인을 통해 자신의 옛 영지가 앙숙 네빌 가문에 넘어갈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자신의 피같은 영지가 앙숙에게 넘어가는 걸 두고만 볼 수 없었던 노섬벌랜드는 차남인 로드 에거먼트에게 토머스 네빌의 혼인 행렬을 공격할 것을 명했지만, 혼인 행렬을 호위하고 있던 솔즈베리에 의해 격퇴된다. 그리고 앙숙끼리의 이같은 갈등은 곧 전면적인 전쟁으로 번져, 양측은 서로의 영지에 대한 습격을 계속하는 상태가 되었고,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솔즈베리는 매형인 요크 공작에게 지원을 청한다.

퍼시 가문을 물리치기 위한 힘이 필요했던 네빌 가문과 서머싯에 대항할 동맹군이 필요했던 요크 공작의 이해관계는 정확히 일치했고, 네빌 가문은 요크의 섭정 취임을 위해 힘쓰는 대신 요크는 퍼시 가문과의 전쟁에서 네빌 가문을 지원한다는 비밀 협정이 맺어진다.

그리고 귀족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컷던 네빌 가문의 전폭적인 지지는, 요크가 섭정으로 선출되는, 서머싯에게는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결과로 이어진다.

섭정으로 선출된 요크는 서머싯을 당장 런던 탑에 감금하고, 네빌 가문은 섭정 요크의 지원하에 퍼시 가문을 마음껏 짓밣으며 권력을 만끽했다. 바야흐로 요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요크의 천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451년 왕이 회복되어 국정을 돌볼 수 있게 되면서 요크는 섭정에서 물러나게 되고, 서머싯 역시 풀려났으며, 네빌 가문에게 고전하던 퍼시 가문 또한 한숨 돌리게 되었다.

혼자 힘으로 네빌 가문과 맞서기엔 힘이 벅찼던 퍼시는 서머싯과 손을 잡고, 왕의 복귀로 정치적으로 다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 요크 공작과 네빌 부자는 군사력에 호소하기로 결심한다. 이들은 퍼시와 서머싯이 손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은밀히 런던을 떠나 자신의 영지에서 군사를 모으기 시작했다.

잉글랜드는 이렇게 두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국왕과 손을 잡은 서머싯과 퍼시 가문과 이에 맞서는 요크 공작과 네빌 동맹군간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잉글랜드의 미래를 바꿔놓은 장미 전쟁의 시작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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