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부활과함께 명실상부한 최고권력자 자리에 오른 덩샤오핑이지만,그역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마오쩌뚱에게류샤오치,저우언라이라는 견제세력이 있었다면 덩샤오핑에게는 천윈이있었는데,개혁·개방을추진하는 덩샤오핑에 있어 이 천윈이라는 인물은 실로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20세의 약관의 나이에 공산당에 입당한 천윈은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도 승승장구하게 되고,1949년 건국과 함께 부총리와 재정경제위원회 주임을 겸해 전국의 경제 정책을 총괄했다.천윈은 부임 후 통화량을 줄이고 식량 등 산업을 나라의 관리하에 두는 방법을 통해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만성적이 되었던 인플레이션을 잡는데성공했고,1961년 대약진 운동 실패 후 무너진 경제 질서를 바로잡은 것 역시 천윈이었다.천윈은 경제활동에 있어서 중앙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정상적인 생산 활동을 회복시키는 방법을 통해 경제를 재건하는데,이로인해 ‘재정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물론 천윈이 마냥 보수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1962년 천윈은 농촌에 ‘청부 제도’를 실시하자는 제안을 하는데,이는 희든 검든 고양이는 쥐만 잘잡으면 된다는 덩샤오핑의 주장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하지만 천윈은 계획경제를 중시했고,경제는 새와 같아서 날아가지 못하게 조롱 안에 가둬야 한다는‘조롱론’을 주장했는데,이 천윈은 덩샤오핑에게 있어 개혁·개방을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자 협력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덩샤오핑 집권 이후 중국은 ‘팔로지국’이라 불리게 되는데,이 팔로 중에서도 야오이린과 같은 이는 천윈의 신중론에 동의했기 때문에 덩샤오핑 역시 개혁에 있어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덩샤오핑에게도 의지할 수 있는 두 걸물이 있었으니,바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었다.이둘은 60대 중후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덩샤오핑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포스트 덩샤오핑의 선두주자로 여겨지고 있었다.1984년일본 수상과의 회담에서,덩샤오핑은 ’하늘이 무너져도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있는 한 문제없다’고 했을 정도로 두 사람을 높게 평가했는데 이 시점에서 자동차의 두 바퀴와 같다고 일컬어진 두사람의 실각은 곧 덩샤오핑의 몰락을 의미했고 있을수 없는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그러나 이후 5년이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차례로 실각하고 권력은 장쩌민에게 넘어가게 된다.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실각은 덩샤오핑의 정치 사상에 대한 두사람의 오해 혹은 이견으로 인한 것이었는데,경제,정치 모두에서 개혁주의자였던 두 사람과 달리 덩샤오핑은 경제에서는 개혁을 지지했지만 정치에서는 1989년 정치풍파 이전에도 1978년 베이징의 봄 사건을 탄압하는 등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당시 중국 지도부의 라인을 대충 그려보면..)
경제:덩샤오핑-후야오방-자오쯔양(진보)vs 천윈-야오이린-리펑(보수)
정치:후야오방-자오쯔양-완리(진보)vs 덩샤오핑-천윈-야오이린-리펑(보수)
덩샤오핑 집권 이후 공산당 총서기의 자리에 오른 후야오방의 실각은 바로 이 정치문제,구체적으로는 학생운동,언론자유보장과 같은 부분에서의 이견으로 비롯되었다.
개혁·개방이후,특구가 세워지고 서양 문화가 들어오면서 영어 광고판이 즐비하게 늘어서고 수영복 차림의 포스터가 등장했다 싶더니,어느새 여성은 화장을 하고 퍼머를 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매춘부와 마약까지 들어오게 되었고 이런 ‘정신오염’은 방사능처럼 특구를 넘어 순식간에 중국 전토로 퍼져나갔다.이는 과거 혁명을 주도한 원로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이로 인해 보수파들은 1983년“반정신오염운동”을 일으켰고 덩샤오핑도 여기에 힘을 보태게 된다..그러나 여성들의 스커트나 파마나 규제하는 이 운동은 당연하게도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는데,개방적인 후야오방 역시 이를 반대하고 나섰고,비판의 대상이 경제특구로 옮겨가자 덩샤오핑 역시 이에 동의해 운동은 중지되지만,이로인해 후야오방은 보수파의 분노와 원성을 한몸에 받게되었다.
결정적인 파국은 3년뒤에 찾아왔다.그해9월,덩샤오핑은 후야오방에게 “나는 완전히 은퇴하려고 하네.자네도 절반 정도는 은퇴하도록 하게”라고 하면서 세대 교체를 추진하고 권력욕이 없었던 후야오방은 여기에 흔쾌히 동의하는데,이것이 문제가 되었다.덩샤오핑의 이 발언이 실현되게 되면 자오쯔양 등 후야오방과 같은 세대의 지도자들 역시 은퇴 압력을 받게 되거니와 덩샤오핑 세대의 원로들은 꼼짝없이 은퇴할 수 밖에 없어지는데,몸은 나훈아지만 마음만은 샤이니였던 이 원로들에게 80대의 한창 나이에 은퇴해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라는 것은 안될 말이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이즈음해서 원래 좋았던 자오쯔양과의 사이에도 이상이 생기기시작한다.쾌활한 성격의 후야오방의 가벼운 언동이 자오쯔양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말도 있다.후야오방은 점점 고립되고 있었다.12월,고립된 후야오방에게 최악의 위기가 찾아왔다.안휘성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위는 전국으로 퍼져나갔고,격노한 덩샤오핑과 원로들은 후야오방이 “부르주아 자유화풍조를 방치했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고 비판한다.사실 당초 학생들의 불만은 형편없는 학생식당의 서비스와 비싼 학비 정도였기 때문에 이 시위가 그렇게까지 위험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이었지만,그들의 요구가 ‘민주’,’자유’로 집약된 것은 사실이다.시위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후야오방에 대한 책임설이 대두되었고,자오쯔양까지등을 돌린 사면초가의 상태에서 연일 계속되는 자신을 비판하는 회의와 함께 점점 야위워가던 후야오방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총서기직에서 사임하고 만다.
후임 총서기는 남은 ‘두 바퀴’중 하나인 자오쯔양이었다.자오쯔양은 전임 후야오방 총서기의 개혁 드라이브를 더욱 강경하게 이어가지만,이런 자오쯔양에게도 시련이 찾아온다.아이러니컬하게도 자오쯔양 실각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다름아닌 후야오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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